1934 ~ 1950 : 경성부민관 열림/닫힘

경성부민관
일제 때 경성부의 대집회용 건물로 세워진 것으로, 1934년 7월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 해 12월 10일 완공되었다. 부민관 내에는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사교실 등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당시로서는 경성 유수의 건물이었으며, 대강당은 좌석 약 2,000석이 되는 큰 것으로 연극, 강연회, 음악회, 기타 대소집회를 치를 수 있는 곳이었다.

[ 부민관 폭파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 청년 조문기(趙文紀), 류만수(柳萬秀), 강윤국(康潤國)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1945년 7월 24일에 일어난 부민관 폭파 의거는 당시 부민관에서 조선총독과 조선군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일제 말기의 친일파 박춘금이 일본에 충성을 표시하고 아시아 민족을 전쟁의 제물로 내몰기 위한 친일 관제 민중대회)’가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의 주최로 열리고 있는 중 조문기(趙文紀) ㆍ 유만수(柳萬秀) ㆍ 강윤국(康潤國)이 사제폭탄 2개를 터트린 사건이다. 이 의거로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수포로 돌아갔고, 해방 20일 전에 일어난 이 의거는 우리민족 독립항쟁의 마지막 정열을 대변한 쾌거로서 그 끝을 장식하였다 할 수 있다.

1950년대 중엽 ~ 1974 : 국회의사당열림/닫힘

국회의사당
광복 후 한국전쟁까지 주로 연극 상연장으로 사용되었고, 환도 후인 1950년대 중엽부터 국회의사당으로 개조해 사용되었다.대한민국 제2대 국회부터 9대 초반까지 활용되었으며, 당시 근대민법제정, 내각책임제 개헌, 유신헌법 제정, 월남파병 동의 등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많은 사건이 있었다.

1975 ~ 1990 : 세종문화회관 별관열림/닫힘

세종문화회관 별관
1975년 이후 다시 서울시의 관할로 되돌아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각종 공연과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당초 태평로의 대로변에 접해 있던, 램프 달린 주 현관은 도로 확장 때문에 헐리고, 탑하부(塔下部) 남쪽에 새로 현관을 만들어 그 이전의 균형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다.

1991 ~ 현재 : 서울시의회 의사당 및 사무처열림/닫힘

서울시의회 의사당 및 사무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이 제정ㆍ공포되었으나, 지방의회 의원 선거의 연기 및 6.25전쟁 등의 우여곡절로 계속 연기되어 오다 1956년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민선 시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초대 시의회가 개원되었고, 제2대 시의회는 1960년 12월 12일 구성되었으나 1961년 5월 16일 발표된 포고령 제4호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여 오다가 1990년 12월 31일 지방자치법 제9차 개정(법률 제4310호)으로 1991년 6월 20일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의원정수 132명으로 구성된 제3대 시의회를 개원하였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던 것을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활용토록 하였으며, 현재는 지난 2014년 지방동시선거에 의거 의원정수 106명으로 구성된 9대 시의회에 이르고 있다.
■서울시의회 본관
1935년에 지어져 당초 경성부민관으로 활용되다가 여러 용도를 거쳐 199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시의회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총 면적은 연 6,009.75㎡에 이르며 지상 4층, 지하1층 건물로서 모서리 부분에 63 척의 탑을 올리고 있다. 본관에는 시의회 본회의장, 운영위원회 회의장, 의장실 및 시의회사무처 등이 자리 하고 있다.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1973년에 구축된 건물을 1996년 리모델링하여 현재까지 시의회 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상 9층, 지하 1층짜리 건물로 연면적 7,683.67㎡에 이르며 9개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의원연구실, 대회의실 및 시의회 자료실 등이 있다.